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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무적의 투표부대. 호남표의 진실을 알려주마

2004.04.19 22:38

장산곶매 조회 수:16366 추천:5


이번에도 위기의 조국을 호남이 살려냈다.

인터넷에서는 20~30대가 무적의 투표부대라고 여기저기 '투표부대가'가 울려 퍼졌지만, 이건 뭐 민방위 앞에서 고딩들 교련 수업 하는 격이다. 무적의 투표부대는 이미 20년 전, 20대부터 90대까지 참여하여 조직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호남'이다.

아마 '호남표=DJ표' 그리고, 'DJ는 전라도 출신이라 지지'라고 분석하는 찌라시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2002년 국민경선 때 노무현 후보 선출과, 이번 총선 결과가 기적같이 보이겠지만, 호남에서는 예상된 결과였다.

왜냐하면, 호남 투표부대의 목표는 '호남 출신 대통령 만들기'가 아니라, '전두환 반란군 소탕'이고, 이를 위한 실천 방안은 '현실 가능한 정치세력에 힘 모아주기'였다. 다만, 여태까지 전두환 반란군을 소탕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DJ와 민주당으로 모아진 것일 뿐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고 있다면, 왜 지난 국민경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선택하고, 이번에도 열린우리당에 표를 모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적의 호남 투표부대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적의 호남 투표부대, 그 전모를 밝혀주마.



80년 시민군이 지도부

호남의 투표부대 지도부는 80년 광주시민군이다.

80년 오월항쟁. 총 인구 80만 밖에 안 되는 도시에 20사단 전체 병력과 3개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중남미의 왠만한 나라 정규군 전체와 맞먹는 병력이 투입된 것. 투표권 자체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총을 들고 싸웠지만 엄청난 피를 흘리며 패배했다.

그렇지만, 이 싸움을 통해 적의 정체를 파악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기나긴 전쟁을 준비했다.

87년까지는 우리의 무기 투표권을 되찾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싸움의 지도부는 망월동에 묻힌 전사들. 그들이 우리의 동지와 적을 확살히 구분해 주었고, 우리에게 힘을 붇돋아 주었다..  



80~87년 꽃병 세대가 장교

호남의 투표부대 장교들은 80~87년까지의 꽃병 세대.

적들을 투표로 제압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꽃병과 철근을 들고 싸울 수 밖에 없었던 시대이다. 이 때 특히 전남대학교가 사관학교 역할을 하였는데, 5월에 치뤄지는 중간고사는 항상 레포트나 기말고사로 대체되었고, 남학생들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 날마다 소주를 먹을 수 밖에 없었으며, 여학생들은 보도블럭을 깨기 위해 조그만 망치를 들고 다녔다.

당시 광주지역에 소주를 공급하던 보해소주는 빈병이 회수가 안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마크(경월, 금복주, 진로 등)가 선명히 찍힌 소주병에도 어쩔 수 없이 보해소주를 담아 팔았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를 거쳐 87년 투표권을 찾았다.

하지만, 87년 투표부대는 지역으로 분열되어 패배하고 말았다.



87~92년, 고립과 분열은 패배

87년 분열로 패배한 후, 호남의 투표부대는 오월항쟁의 진실을 다른 지역에 알리며 동맹군 편성에 주력하였고, 5월 마다 도청 앞에서 투표부대 총결집 훈련(?)을 받았다.

생각해 보라. 총인구 100만도 안되는 도시에서 10만~15만명이 모인 집회라면 전체 인구의 10~15%가 집결한 것. 당시에는 요즘 촛불시위처럼 아이들을 데리고 올 분위기가 아니었으니, 한 가구에 한명은 꼭 나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시기에 고립되어 싸우거나 분열하면 질 수 밖에 없다는 경험은 누적된 학습으로 체화되었다.

특히, 광주에서 89년 이철규 의문사 진상규명 투쟁은 아픈 기억이다. 87년 기억이 생생하던 89년, 그것도 오월에 조선대생이 의문의 시체로 떠올랐다. 당연히, 광주는 분연히 일어났고 거의 1달 동안 도심기능이 마비되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시선은 차가웠다. 또다시 80년 오월처럼 광주가 고립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눈물을 쏟으며 깃발을 내렸다.

그리고, 90년 3당합당으로 반란군 세력이 호남을 재포위하였다. 그해 오월, 광주 무등경기장은 전국에서 집결한  전투경찰의 야전숙소가 되었고 광주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91년 오월투쟁도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웠지만, 이미 혁명의 시대는 지나버렸고…

이 시기 몇차례 고립된 투쟁을 거치며, 호남의 투표부대는 광주만의 힘으로는 뒤집어 엎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몸조심을 하며 92년 대선을 준비했다. 머리수가 부족한 상태에서 고립은 곧 패배였기에...

김대중 후보는 호남에서 딱 한번 숨어서 유세를 했고, 대선 분위기는 정말 썰렁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김영삼 후보 유세 때 광주사람들이 박수쳐 줬고(호남에서는 지역감정이 아닌 인물을 보고 찍는 다는 것을 다른 지역에 과시하기 위해), 당시 전남대학교 오월대는 지역감정 유발을 위한 자작 테러가 우려된다며 김영삼 유세 호위조로 투입되었다. 모두가 호남고립화의 빌미를 주지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생들은 호남에서 할 일이 없다면 다른 지역으로 파견되었고, 난 당시 부산에서 공정선거감시단으로 활동했었다. 두어번 정도 백색테러 당할 뻔 했는데, 당시에 백골단 앞에서는 안 쫄았지만, 식칼들고 설치는 깡패들은 무서웠다.

하지만, 200만 표 차. 딱, 호남과 영남의 인구수 만큼 졌다.

그리고, 부산에서 광주로 귀환하는 날 섬진강을 넘어 전라도로 들어설 때부터 비가 왔다. 정말이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상한 일. 사람들은 모두 호남의 눈물이라고 불렀다.



93년 이후 일하며 싸우는 투표부대로 전환

무슨 짓을 해도 200만 표의 경계를 넘기 힘들었던 92년 대선 후, 호남 투표부대의 노선은 이러했다.  

'경상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애들을 많이 낳아 20년 후를 기약한다'

93년 이후 가두에서의 싸움 시대는 지났고, 20년 장기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평시에는 일하고 유사시에 싸우는 투표부대로 전환된 것.

YS의 개혁에는 박수 쳐주었지만, 그렇다고 반란군 잔당에 표를 줄 수는 없었다. 선거 때마다 투표부대는 현실가능한 정치세력에 표를 몰아줬지만, 조중동은 영호남 지역주의라며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호남의 투표부대는 묵묵히 욕을 먹으며 한 길을 갔다. 반란군 잔당을 확실히 소탕하기 전까지 힘을 모아야 했기에...

그리고, DJ의 정계은퇴와 복귀. DJP 연합. 논란은 많았지만, 현실 가능한 정치세력으로 92년 보다 더 조심하며 지지했다. 그리고, IMF를 거치며 꿈 같은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2002년, 노무현 후보 선출

2002년 국민경선. 어떻게 노무현 후보가 선출되었는가? 모두가 기적이라 했지만, 이는 호남 투표부대의 노선에 가장 잘 맞는 후보였기 때문에 선출된 것이다.

이인제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현실가능한 대안을 찾던 중 노무현 후보가 눈에 띈 것이다.

다시 한번 복습해 보자. 호남 투표 부대의 20년 프로젝트!

'경상도 배우자를 만나 결혼하고, 애들을 많이 낳아 20년 후를 기약한다' 이 노선이 약간 바뀐 것으로, 개개인이 20년을 기다릴 필요 없이 호남 전체가 영남 배우자를 데려와 대통령 만들어주기로 한 것으로, 호남이 부산 출신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것이다.



2004년, 꼴통들을 응징하다

2004년 총선은 좀 복잡했다. 탄핵이 없었다면, 아마 민주당-열린우리당 중 인물에 따라 될만한 사람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대원들은 호남은 걱정 없지만, 수도권에서 표가 갈리면서 반란군이 의석을 먹는 것을 가장 우려했다. 그래서, 우리당-민주당 싸움하면 어떤 놈이 내부의 적인지 명단 작성하며 투표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꼴통들이 탄핵이라는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그래서, 뭐 투표부대는 이번 전투에 부담 없이 나갈 수 있었다.

호남 투표부대 입장에서 탄핵은 고마운 일이었다. 주적을 앞에 두고 표가 어떻게 갈릴 것인가까지 계산해야 하는 고차원방정식 구도를 깨고, 표적을 명확하게 해주었으니...

그래서, 지역구 5석이면 민주당이 예상 밖의 선전을 한 거다. 일단 광주를 제외한 시골지역은 여론을 집중시키기 힘들었고, 우리당 후보가 인물에서 밀렸기 때문에 민주당이 당선된 것이다. 그렇지만, 박상천 같은 꼴통은 엄청난 조직력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보내버렸으니 무적의 투표부대 위용을 만방에 떨친 것은 변함이 없다.



호남 투표부대도 제대하고 싶다

호남 투표부대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국민을 총칼로 학살했던 놈들, 국민을 열받게 만드는 놈들은 확실히 방법하는 것. 그러니, 열린우리당도 몰표 받았다고 방심하면 안된다.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DJ 아들-손자 트럭 채 와도 꼴통 짓 하면 한번에 날려버릴 사람들이니...

만약, 2004년에 반란군 잔당이 확실하게 소수파로 찌그러질 것으로 보였다면 민주노동당의 표가 훨씬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의 패잔병 딴나라가 준동하는 전국적 판세를 고려하여 또다시 투표부대를 소집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전두환 패잔병을 확실히 격멸할 때까지는,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 전투에 임하는 무적의 투표부대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따로 있다.

제발 먹고 살기도 힘든데, 호남도 고민 좀 덜 하고 살게 해 주라. 언제까지 5월마다 도청 앞 총집결 훈련에, 투표 때마다 전국 판세 분석하며 전투해야 하나. 80년 오월 시민군 출신들 이제 50대를 넘어섰다. 제발 반란군 놈들 뿌리를 뽑아 호남도 좀 마음대로 찍을 수 있게 해주라. 부탁이다.





무적의 호남 투표부대 소총수
오월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