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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에게 '구세주' 같은 이런 농협이 있다면

[독일의 농부 4] 농가 고리부채 해결사, 라이파이젠 농민은행

"feines aus unsere region(우리 지역에서 생산한 진짜, 좋은 농산물)"

독일 단슈타트(danstadt) 지역은 광활한 채소밭이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진다. 버스를 타고 달려도 끝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지평선을 이해하기 힘든 한반도 약소국에서 온 사람에게는 비현실인적 피안의 공간처럼 다가온다. 굳이 유사한 광경을 비유하자면, 함초가 무성한 광활한 서해갯벌처럼 느껴진다.

라이파이젠 유기농·농자재 마트(ZG raiffeisen markt)는 그 평야의 그 어디쯤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매장 입구에 "feines aus unsere region(우리 지역에서 생산한 진짜, 좋은 농산물)"이라는 현수막을 구호처럼 내걸었다. 라이파이젠 유기농·농자재 마트(ZG raiffeisen markt)는 한국으로 치면 농협의 경제사업장인 하나로마트 쯤에 해당한다. 얼핏 겉으로 보면 상품 구성이 한국의 하나로마트와 크게 다른 게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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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협의 하나로마트에서는 농축수산물, 가공식품, 생활필수품 등을 산지직거래를 통해 판매한다. 하지만 매장을 찬찬히 둘러보면 독일의 라이파이젠 마트와 한국의 하나로마트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를 곧 발견할 수 있다. 매장 입구에 내걸린 "feines aus unsere region(우리 지역에서 생산한 진짜, 좋은 농산물)"이라는 홍보 현수막에 이미 답이 쓰여있는 셈이다.

라이파이젠 마트에서는 수입농산물, 관행농법 농산물을 팔지 않는다. 이른바 유기농 로컬푸드만 취급한다. 이같은 라이파이젠 마트의 경영철학은 스위스 국민들 열 명중 일곱명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생협 미그로(Migros)의 슬로건을 연상시킨다.

"지역으로부터 지역에게로(aus der region, für die region)"

미그로 매장이나 라이파이젠 매장에는 공히 친환경농산물(bio)보다도 지역농산물(region)이 가장 좋은 자리에 진열되어 있다.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뜻이다. 믿고 선뜻 구매한다는 의미다. 지역순환농업과 지역순환경제가 국민의 소비생활 현장에 넓게, 깊이 용해, 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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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파이젠 매장 “feines aus unsere region(우리 지역에서 생산한 정말 좋은 농산물만 팔아요)“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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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농민의 구세주, 신협의 아버지, 라이파이젠(raiffeisen)시장  

라이파이젠 마트는 일종의 농업 관련 복합매장이다. 유기농산물, 유기농식품은 물론 유기농종자, 유기농업 관련 농자재와 농기구 등을 모두 구비하고 있다. 도시의 소비자는 물론 농민들도 웬만한 먹거리와 농자재는 원스탑 쇼핑이 가능하다. 이같은 라이파이젠 마트의 경영철학과 매장 운영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공부해야 할 게 있다. 모법인인 '농가 고리부채 해결사' 라이파이젠 은행(raiffeisen bank)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이파이젠'은 사람 이름이다. 쾰른 남동쪽 작은 농촌마을인 바이어부쉬(Weyerbusch)의 시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라이파이젠(F.W.Raiffeisen)이 그 사람이다. 오늘날 신용협동조합의 아버지로 추앙 받고 있다. 라이파이젠이 신용협동조합을 만든 것은 농민의 고리채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서다. 18세기 독일의 봉건적 토지소유자와 지배 권력자로부터 농민을 구원하려는 시대적 사명감 때문이었다.

18세기 독일은 봉건적 토지소유자와 지배 권력자가 야합한 산업혁명의 부작용과 악영향으로 시달렸다. 도시의 영세 독립 소생산자들과 농촌의 소작농들이 상업자본가의 고리채에 의존하며 가혹한 경제적 수탈을 당했다. 특히 1847년 대기근으로 독일 농민들은 기아에 허덕이며 극심한 민생고를 겪었다.  

그때 굶주리고 죽어가던 농민들 앞에 라이파이젠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다. 우선 마을 기금을 조성해 농민들에게 곡식을 외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1849년에는 본격적으로 프람멜스펠트 빈농구제조합을 설립해 농민들에게 가축을 구입할 자금을 빌려주었다. 조합원 60명이 무한연대책임으로 돈을 빌려 가축을 사고 5년 동안 나누어 상환하는 대출방식이었다. 이렇게 농민들이 십시일반 힘을 모아 함께 세운 신용협동조합은 1862년에 라이파이젠 은행(Raiffeisenbank)으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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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파이젠 마트 독일 단슈타트의 라이파이젠 유기농?농자재마트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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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상인들의 시민은행과 도농상생 합병을 

독일 경제의 기반은 가히 협동조합이라 할 수 있다. 독일 농업의 기반도 마찬가지다. 독일 농업을 유지하는 힘은 농업전문학교, 가족농, 문화경관직불금, 농업회의소, 그리고 농민·농업 협동조합(gemeinschaft, genossenschaft)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300여 개에 달하는 신용협동조합, 시민은행(Volksbanken), 신용협동조합이 독일 경제와 농정을 떠받치고 있는 저변이자 저력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라이파이젠 은행은 협동조합이라 증권거래소 기업공개도 안 되고  외부 투자 유치도 어려워 자금조달이 쉽지 않다. 적정한 수익을 유지하며 경영하기가 일반 상업적 법인에 비해 쉽지 않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구책을 마련했다. 1890년부터 조합원들에게 배당을 하지 않기로 했다. 수익금은 라이파이젠 은행 내부에 순자기자본으로 차곡차곡 적립, 축적되었다.

결과적으로 18세기 마을금고 수준에서 출발한 라이파이젠 신협은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은행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 재정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 경영을 고수하고 있다. 위기는커녕 오히려 조합원이 늘고 있다. 조합원 보호, 조합원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독일은 국민 4명 중 1명이 협동조합원인 협동조합의 나라다.  독일을 가능하게 만든 원칙이다. 당연히 농촌의 농민들이 세운 라이파이젠 은행 말고도 도시지역의 상인들이 세운 협동조합은행도 많다. 도시 상인들이 1850년 설립한 시민은행(Volksbanken)이 대표적이다. 각각 농촌과 도시라는 출발점과 기반이 달랐던 두 은행은 현재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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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파이젠 은행 오스트리아 잘펠덴의 라이파이젠 은행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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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협동조합은행 성장 비결은 '조합원 안전제일'

1000여 개 협동조합은행의 연합체인 푸랑크푸르트의 DZ방크(deutsch zentral-genossenschaft bank, 독일중앙조합은행)는 상위기구로서 협동조합은행의 안정된 경영전략과 효과적인 마케팅전략을 책임진다. 또 우베 프뢰리히(uwe frohlich) 독일시민은행․협동조합은행 연방협회(BVR) 의장은 "좋은 날씨에 좋은 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궂은 날씨에 좋은 것을 보는 것이 능력"이라는 소신을 놓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독일 협동조합은행의 전략과 원칙이 위기를 기회로 만든 원동력이다. 위기 때마다 조합원 보호, 조합원 안전제일을 지상과제로 삼은 협동조합 은행을 조합원들은 신뢰하고 지지한다.

구체적으로 독일 협동조합은 예금자 보호를 위한 이중 보호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회원조합의 분담금으로 설립한 보장기금(guarantee funds)과 보장망(guarantee pool)으로 나뉜다. 보장기금은 회원조합에 심각한 위기가 닥치면 보증과 대출을 제공해주고 보조금과 개선대책까지 수립해준다. 회원조합들의 보증으로 운영되는 보장망으로 예금도 전액 보장된다. 예금보호 한도에 제한이 있는 상업은행보다 더 안전한 것이다. 게다가 자체 보호제도는 연방금융감독청 감독 아래 안정적으로 운영, 독일에서는 1930년대 이후 단위 협동조합은행이 파산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고 한다.

'조합원 안전제일'의 독일 협동조합은행은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를 거치며 소비자의 신뢰가 더욱 증폭되었다.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150만 명의 조합원이 늘어 2013년 현재 조합원은 1750만 명에 이른다. 매년 30만 명이 신규 조합원으로 가입한 셈이다. 주주의 수익이 아닌 주인인 조합원을 위하는 협동조합원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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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파이젠 은행 스위스 취리히 반호프거리의 라이파이젠 은행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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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협은 '라이파이젠 농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 어디를 가나 마을과 지역의 중심부마다 자리 잡고 있는 라이파이젠 농민은행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한국의 농협이 저절로 떠올랐다. '제왕적이고 정치적인 간선제 선출 중앙회장'으로 상징되는 우리 농협의 문제와 자꾸 비교됐다.  '공룡같은 비대조직' 중앙회의 힘이 그대로 '무소불위의 제왕적' 중앙회장에게 집중된 한국의 농협.

한국의 농협은 '농민의 소득을 위한' 경제사업보다는 '농협이 돈 버는' 신용사업에 매달려 있다. 심지어 농민이 아닌 도시민을 주거래고객으로 삼아 '돈 놓고 돈 먹는 돈장사'에 열중하고 있다. 공익을 위한 협동조합이 아니라 사익을 좇는 일반은행의 모습이다. 지역농협도 신용사업 수익에 목을 매달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농업소득과 밀접한 농산물 생산·가공·판매 사업은 적자사업, 환원사업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

이른바 '신경 분리(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의 분리)'도 성공적이지 않다. 오히려 협동조합 방식이 아닌 주식회사 방식으로 진행되면서 농협중앙회는 거대 지주회사로 변신하고 말았다. 농협중앙회는 '회원의 공동 이익증진과 그 건전한 발전을 도모(농협법 제1113조)'를 목적으로 하는 연합회 조직으로부터 더 멀어졌다. 자체 이익을 극대화하는 조직으로 더 변질되고 말았다.

경제사업은 회원조합을 위한 연합사업이 아니라 중앙회 자체사업이 중심이 되어버렸다. 역시 지역조합이나 농민조합원의 경제적 이익이 우선이 아니다. 결국 경제사업의 목적이 회원조합의 공동이익 증진이 아니라 중앙회 자체의 자기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꼴이다. 심지어 회원조합과 잦은 대립과 마찰마저 일으킬 정도다. 중앙회가 경제사업을 하는 사업목적과 책임의식조차 상실한 지경이다. 이같은 문제는 중앙회가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농협의 개혁은 근시안적인 미봉책이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때 '회원조합을 지원하는 연합회'로 재편하는 비전부터 확고히 설정해야 한다. 경제적 책무보다 사회적 책무를 더 강조해 '협동조합'으로서 본질적 정체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가령, 중앙회는 비사업적 기능을 전담, 중앙회 출자 자회사 또는 주식회사가 아니라 중앙회로부터 독립적인 회원조합의 연합회 체제로 전환하는 게 최적의 해법이다. 그렇게 농협은 '협동조합의 원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단 죽어서 '라이파이젠 농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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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파이젠 마트 농산물, 농식품 외에 종자, 농기구, 농자재 등을 함께 판매하는 복합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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