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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펌)

2013.08.09 08:52

광농민노 조회 수:9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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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햇발] 설국열차, 내 맘대로 해석하다 / 김의겸

등록 : 2013.08.08 18:59 수정 : 2013.08.08 18:59

김의겸 논설의원

세상 참 좋아졌다. 노골적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자’고 선동하는 영화가 버젓이 걸리다니. 내 눈엔 온통 계급사회와 혁명의 상징물로 가득 찬 영화로 보이는데….

설국열차의 ‘성스러운 엔진’은 증기기관을 닮았다. 산업혁명의 기폭제이며, 공장제 기계공업을 작동시킨 힘이다. 엔진이 멈추지 않는 한 자본주의란 기관차는 영원히 질주한다. 이 엔진은 가동을 위해 아이들을 필요로 한다. 엥겔스가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처절하게 고발했던 19세기 아동노동이다. 21세기에도 스리랑카 어디선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착취형태다.

열차의 지배자 윌포드의 이름은 대량생산 체제를 도입한 포드의 이름에서 따왔을 것이다. 군복을 입은 일본인도 아시아에서 앵글로색슨 자본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헌병 노릇을 자임했던 일본을 은유한다. 열차 꼬리칸의 반란을 묘사하는 장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영화의 고전 <전함 포템킨>을 떠올리게 한다. 러시아 수병들의 폭동을 낳은 썩은 고기는 바퀴벌레가 원료인 단백질 블록으로, 코사크 기병대들의 칼날은 복면을 쓴 진압부대의 도끼날로 대체됐을 뿐이다.

하지만 어쩐지 영화가 결정적으로 위험해 보이진 않는다. 봉준호 감독이 말하고 싶은 건 결국 기차를 세우자는 거다. 반란이란 것도 시스템 안에서 지배층의 변화만 꾀하는 것일 뿐 수탈 구조는 계속되니 아예 뒤집어엎자고 부추긴다. 하지만 파괴만 있지 창조는 없다. 영화처럼 그저 북극곰 하나 믿고 열차에서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혁명은 현실의 고달픔만으로는 일어나지 않는다. 미래의 유토피아가 보일 때에야 사람들은 굴종의 무릎을 펴는 법이다. 관객들이 눈밭에 선 두 아이의 눈에서 희망을 발견하리라 기대하는 건 너무 낭만적이다.

영화의 불온성은 특히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거세된다. 꼬리칸 같은 단결이 사라진 지 오래기 때문이다. 8일 현대차 비정규직 두 사람이 송전탑에서 내려왔다. 300일을 못 채웠다. 그들의 처진 어깨에서 좌절을 읽는다. 꿈쩍도 안 하는 회사와 정부 탓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절규에 귀기울이지 않는 동료 노동자들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똑같이 울산에서 현대차를 만들지만, 처지에 따라 네 갈래 다섯 갈래 찢겨 있다. 임금만 봐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가 현대차 정규직에 비하면 73% 수준이지만, 1차 부품사와 비교하면 124%, 2차 부품사에 비하면 166%를 받는다.(유형근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과 변형>) 철탑 농성을 보며, 현대차 정규직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다’며 발을 빼고,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비정규라도 현대차에 자리 하나 안 비나’ 하며 줄을 서 있다.

꼬리칸에 산다고 모두 똑같은 게 아니다. 누군 가끔 스테이크를 먹고, 누군 역겨운 단백질 덩어리도 없어 쫄쫄 굶는다. 게다가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정규직 해고의 완충작용을 하는 ‘인간 쇼바’다. 설국열차의 지배자 윌포드가 개체수를 조절할 때 ‘너희들은 건드리지 않을게’라며 정규직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의 철문을 뚫고 나갈 수 없다.

방법은 역시 하나, 자기희생밖에는 없다. 조금 더 가진 쪽이 동료를 향해 자기 몫을 내주며 하나가 되자고 손을 내미는 것 말이다. 꼬리칸에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자기 팔을 먹잇감으로 내줬던 열차 안의 성자처럼. 하지만 그 이야기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독백으로만 처리된다. 그래서 난 봉 감독이 설국열차 이전 17년의 전사를 속편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가슴 뭉클한 헌신과 감동의 미담이겠으나, 지배자들로서는 가장 불온하고 급진적인 영화가 될 것이다. 봉 감독, 그땐 진짜 국가보안법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김의겸 논설의원kyumm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