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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속의 머리띠를 꺼내며... (펀글)

2004.04.26 11:41

장산곶매 조회 수:17236 추천:5


오늘 민노당 홈페이지에서 민노당 당원 가입을 했습니다. 왜 가입했냐고 물으면 '그냥'했다고 밖에 말할수 없겠네요. 사실 이전부터 가입할 생각 없진 않았지만, 선거가 끝나고 민노당이 많은 약진을 했기때문에 생각을 굳힌거나 다름습니다.

'당비 3만원 이상 기부하라고 하면 안해야지'라고 생각하고 들어가 보니 의외로 당비는 싸네요. 최하 1만원이군요. 무슨 정당 활동하면 돈이 많이 들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군요. 백수나 주부는 5000원밖에 안하는군요.

며칠전 노조에서 올해 임단협안에 대한 찬반 투표를 했습니다. 그 투표 결과가 엊그제 팩스를 통해 사무실로 날아왔습니다. 단협안 82% 찬성, 가결확정.... 걱정이 앞섰습니다.

'올해는 확실히 조용히 안넘어 가겠군....'

제가 일하는 여긴 다소 떨어져있는 출장소라 노조총회에 참여할수 없어 투표도 우편투표를 하고 미리 단협안에 대해서 올해 개정된 부분에대해서 일찍 자료를 받아 찬찬히 뜯어볼 수 있었기에 걱정이 더 앞섰습니다. 단협안을 보니 백만번 지당한 것도 있었지만, 이건 순전히 싸우자고 걸어놓은 안건도 눈에 간간히 띄었으니까요...

부지부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체 누가 이런 황당한 항목들을 집어 넣었냐구 물어보았습니다.

'너두 알잖냐, 그거 받아낼라고 넣은거 아니란거... 순전히 받아낼거 받아낼때 양보할라고 만든거지 실제로 아무런 의미두 없는거라는거..'

사실 모르는건 아닙니다. 우선 눈에띄는 몇몇안건은 회사가 들어줘도 우리쪽에서 수용할 여력이 없는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넘 심한거 아녜요? 이런거 요구하면 욕먹어요.'

'욕은 무슨.. 작년생각 안나냐. 이런거가지구 눈하나 깜짝할 놈들아니다.'

사실 그렇긴 합니다. 작년엔 우리회사가 창사이래 최대 흑자를 낸 해(재작년 매출)였는데도 2달동안 질질 협상을 끌어 우리가 낸 임금안의 절반도 못 건졌으니까요.

게다가 늘 그렇듯이 임금협상이 끝나자 기습적으로 노조원에게 불리한 인사를 단행해 노조 뒤통수나 치는 파렴치를 떡먹듯 떠는 경영진이니 무슨 안건인들 곱게 보일까 싶어 쓴웃음만 나옵니다.

얼마전 위원장은 전국을 돌며 올해는 꼭 회사와 담판을 지을테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조합원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겸 각지에 흩여진 사업장의 조합원들과 간담회겸 친목회를 한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적인 자리에서 올해도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는 제 심정을 말했습니다.

'올해 꼭 할건가요? 노무팀장 말로는 이제 우리 임금도 업계에서 수준이 높은 축에 든다든데요...
임금같은걸로 우등먹는거 좋지 않아요. 괜히 바깥에서 보면 돈때문에 그런줄로만 알지..'

'나도 안다. 올해 임금부분은 회사가 하자는대로 해줄 생각이다.
하지만, 인사부분은 그대로 두면 우리 다 죽는다. 올해는 꼭 받아내야해...'

나도 그말에 아무런 댓구를 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회사는 몇년째 말도안되는 순환보직으로 조합원들이 많이 나가고 탈퇴를 했습니다.10년 15년, 심지어 25년 한자리에서 있던 사람을 그동안 문서상으로나 있었지 한번더 시행해 본 적도 없는 순환보직이란 제도를 들먹거리면서 사람들을 엉뚱한 지방, 엉뚱한 보직에 배치해 사표도 많이 쓰고, 자기도 타겟이될까봐 자진 탈퇴도 많이 했습니다.

조합원들이 나간 자리엔 6개월동안 '노조는 안된다'라는 세뇌교육과 조합원들에게 일을 배우지 않도록 철저히 스파트타식 시뮬레이션 교육 받은 신입사원들이 속속 배치되었습니다. 못해도 5년이상 선배인데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고 인사조차 않던 신입사원을 보고 신입사원 없는 일터에 있는게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가슴을 쓸어 내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젠 사무실에서 청소를 하는데 사내 분리수거함에 언제 일치인지 모를 한국경제 신문의 기사제목이 큼지막하게 눈에 띄었습니다.

'노조의 부당한 임금인상 압력에 당당히 대처하라'

기사 제목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언제 임금문제로 파업해 본적이 있던가....'

적어도 우리 노조는 회사의 악랄한 와해 공작과 부당노동행위로 파업한 적은 있어도 임금문제만으로 파업한 적은 없었으니...

'어느노조가 형편좋게 돈 더달라고 파업한담... 파업하면 파업기간동안 못받은거 합치면 매번 그모냥 그꼴인데...'

아마 현대차나, 중공업 같은 대 기업 노조는 인원도 많고 힘도 세니 그럴수도 있겠거니 한다지만, 우리같은 작은 노조는 그런소리 들으면 '개 풀 뜯어먹는 소리'나 다름없는 얘기입니다.

저런걸 기사보면 대한민국 노조는 부당한 임금인상이나 요구하는 철없는 단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드니 괜히 착찹해 지기만 합니다.

'올해는 확실히 할테니 집에 있는 머리띠랑 빨간조끼 세탁해 둬라'

올해도 빨간 머리띠를 머리에 묶고 평소때 안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껏 불러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노조 위원장과 저는 연배차이도 꽤 나는데도 제가 일반 사원시절 서로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하고 같이 고생도 많이 한 사이입니다. 나이만 먹은 애같아서 현실문제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늘 집에는 무협지나 환타지 소설이 쌓여있고, 일과후 직원들과 당구치고 술마시고, 휴일엔 직원들과 낚시 가는것 외엔 다른 낙을 찾지 않던 소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쓸데없이 아는게 많아 말이 많던 저와 술자리를 같이 할땐 뜬금없이 어려운얘기를 해댈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계장님 그 얘기 무협지에 나오는 얘기죠?"

"무협지에 진실이 있는거다. 작가가 아무렇게나 지어서 쓴거 아냐"

하고 무협지표 박학다식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만. 그런 소박한 사림이 이제 투사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 눈엔 아직도 소박한 꿈밖에없는 욕심없는 사람으로 보이는데 경제신문과 중앙 일간지 기자들의 눈엔 싸움밖에 걸줄 모르는 싸움꾼으로밖에 안보이나봅니다. 착한 사람을 싸움꾼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아얘 세상에 없습니다.

환타지와 무협지예기가 나와서 말인데,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엘프와 오크의 관계에 이런 얘길 본 기억이 납니다.

'원래 오크종족은 엘프였다, 그러나 사우론의 모진 고문에 얼굴이 흉칙해지고 성질이 사나운 괴물이 된것이 오크종족이다'라고 했든가요?

기자에겐 엘프를 고문해 오크로 만든 사우론은 안보이고 고문당해 흉칙해진 오크만 보이나봅니다.

민노당 사이트에 당원 가입신청을 넣으면서 이런저런 상념이 스쳐간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