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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 안전시설 ‘구멍’…한해 366명 떨어져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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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죽음, 산업재해] ① 산재, 이제 끝내자

건설현장 노동자 작업대 ‘비계’
건물벽에서 1m가량 떨어져 설치
추락해도 막아줄 안전설비 미흡

산재 사고 사망 38%가 추락사
그중 55%가 비계에서 발생
영국처럼 ‘기업살인법’ 제정 필요
(왼쪽) 지난달 11일 영국 레스터의 한 건설현장에서 건물 외벽을 마감재인 벽돌로 덧대는 작업자들. 이들은 비계 위가 아닌 ‘마스터 클라이머’라 부르는 기중기 위에서 일했다. (오른쪽) 지난 9월19일 서울 홍제동의 한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들이 작업 중 근로감독관의 지적을 받은 뒤 안전고리를 비계에 걸고 있다.
(왼쪽) 지난달 11일 영국 레스터의 한 건설현장에서 건물 외벽을 마감재인 벽돌로 덧대는 작업자들. 이들은 비계 위가 아닌 ‘마스터 클라이머’라 부르는 기중기 위에서 일했다. (오른쪽) 지난 9월19일 서울 홍제동의 한 건설현장 비계 위에서 노동자들이 작업 중 근로감독관의 지적을 받은 뒤 안전고리를 비계에 걸고 있다.

144명 대 1957명. 지난해 영국과 한국에서 산업재해(산재)로 숨진 사람의 수다. 산재 예방·대처에 선진국인 영국은 한국보다 인구가 1500만명 많지만 산재 사망자는 13분의 1에 불과하다. 문재인 정부는 산재 사고 사망자를 임기 내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다짐했다. 28년 만에 전부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안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보호 대상 노동자를 늘리고 사업주 책임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한겨레>는 4회에 걸쳐 우리의 현실을 점검하고 필요한 대안을 제시하려 한다. 특히 산재 사망자 가운데 가장 많은 366명의 목숨을 앗아간 추락사에 주목했다.

“갑자기 비상벨이 울릴 수도 있어요. 그러면 일단 계신 곳 근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됩니다. 이후엔 저쪽 정문에서 모이고요. 아셨죠?”

로비 직원은 방문증을 건네자마자 비상탈출 요령을 말했다. “안전 기관이라 유난”이라고 하자 동행한 통역은 “원래 영국에선 이렇다”고 했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모든 다중이용시설에서 이런 안내를 한다” “비상시 탈출구를 알려주는 일은 기본이고 습관”이라고 강조하듯 말했다.

지난달 10일 영국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53㎞ 떨어진 레스터시. 산업안전보건 체계의 한 축을 이루는 산업안전보건협회(IOSH)가 이 도시에 있었다. 영국은 우리에게 2007년 제정된 ‘기업살인법’(법인의 과실치사 및 살인법)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이 주의 의무를 위반해 노동자가 숨지면 이를 바로 범죄로 규정하고 상한이 없는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과거보다 기업의 책임을 강화한 법이다. 영국 산업안전보건협회는 기업살인법을 비롯해 영국의 각종 산업안전보건 관련 법·제도 설계 과정에 개입하는 비영리 민간기관이다.

기업살인법 시행 뒤 영국의 산재 사망률은 눈에 띄게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제정하자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세월호 참사, 가습기 살균제 사태 같은 중대재해를 일으킨 실질적 책임이 있는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 관련 공무원이나 법인(기업) 자체를 처벌하자는 것이다. 반복되는 솜방망이 처벌이 빈번한 중대재해의 원인이라는 문제의식이 바탕에 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꾸려진 ‘중대재해 기업처벌법 제정연대’의 논의를 토대로 고 노회찬 정의당 의원과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돼 있지만, 아직 충분한 관심이 모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가 안전에 소홀하다는 건 영국의 건설 현장 방문에서 확연해졌다. <한겨레>는 지난 9월19일 고용노동부의 ‘비계(건설공사 때 쓰는 임시구조물) 기획감독’에 동행해 서울 홍제동과 녹번동의 상가주택 건축 공사장을 찾았다. 지난달 11일엔 영국 레스터의 한 건설 현장을 둘러봤다. 한국과 달리, 영국의 현장소장은 상한이 없는 벌금을 부과하는 ‘기업살인법’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국 홍제동의 상가주택은 7층 높이였다. 공사 중인 외벽은 어수선했다. 노란 스펀지를 은박으로 감싼 단열재가 붙었고, 비계는 벽에서 1m가량 떨어져 설치돼 있었다. 그 사이로 7층 아래 바닥까지 곧장 내려다보였다. 강철 파이프로 만든 비계엔 층마다 가로로 난간 두개가 있었는데, 바깥쪽에만 설치돼 있었다. ‘외벽 마감재 작업을 위해 안쪽으론 난간을 잘 쓰지 않는다’고 동행한 근로감독관이 말했다. 비계와 외벽 사이는 성인 남성의 몸이 곧장 수직으로 통과할 만했지만, 추락을 막는 안전그물은 건물 바깥으로만 향해 있었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산재 사고 사망자 가운데 가장 많은 366명이 떨어져 숨졌다. 이들 중 55%가 비계에서 추락했다. 비계 위 안전 확보가 중요하지만 이날 30명가량의 현장 작업자 가운데 서넛은 안전대를 차지 않고 안전고리를 걸지 않아 감독관의 지적을 받았다. 안전고리를 걸지 않은 이들은 비계와 외벽 사이를 오가며 작업 중이었다. “작업 속도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현장 관리가 소홀한 경향이 있다”고 감독관이 말했다. 이날 홍제동 현장엔 규정 위반 인원 1인당 벌금 5만원이 부과됐다.

영국 건설 현장에 설치된 비계는 건물과 이격이 아예 없었다. 건설사 ‘윈빅’이 짓는 건물은 260가구 규모의 아파트였는데, 현장을 방문한 일행이 별도의 안전기구 없이도 비계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건물의 연장’이나 다름없었다. 외벽을 마감재인 벽돌로 덧대는 작업자들은 비계 위가 아닌 ‘마스터 클라이머’라 부르는 기중기 위에서 일했다. 현장소장 스티븐 개스코인은 “영국에선 비계 설치 때 절대로 건물과 이격이 있어선 안 된다. (외장 작업에) 필요하면 발판을 잠시 빼서 작업하거나 높이와 구조, 위험도를 따져 기중기를 쓴다”고 설명했다. 그는 비계 위 작업 중 혹시라도 작업자가 떨어지면 2분 이내에 구조해야 하는 규정도 소개했다.

영국, 산재에 ‘상한 없는 벌금’…한국은 고작 ‘몇 천만원’

리처드 존슨 영국 산업안전보건협회 정책공무국장은 “지난해 영국 사법부의 양형위원회가 관련 벌금을 큰 폭으로 올리면서 기업들이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하고 있다”고 했다. 협회 자문역인 마이클 에드워즈는 “무엇보다 ‘일은 외주를 줄 수 있지만, 책임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게 원칙”이라며 “누구든 남에게 일을 시키려면 그 일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산업안전보건청에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우리로선 상상하기 힘든 벌금으로 유명하다. 영국 산업안전보건청(HSE)은 2016년 4월부터 2017년 3월까지 안전보건법령 위반으로 부과된 연간 벌금 총액이 6990만파운드, 한화로 1015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한해 전 같은 기간 벌금 총액은 3880만파운드(약 563억원)였는데 1년 만에 크게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개별 사건 평균 벌금은 대략 12만6000파운드(1억8305만원)로, 한해 전보다 갑절 넘게 증가했다. 벌금액 상위 10위는 300만파운드(44억원)에서 135만파운드(20억원)까지였다. 안전사고를 낸 기업이 많아야 몇천만원 수준의 벌금을 받고, 책임자가 집행유예 정도의 처벌로 끝나고 마는 한국 상황과 차이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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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사회의 안전에 대한 관심은 산업안전보건 업무만 수행하는 별도의 독립된 기관을 두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영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우리의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과 안전보건공단을 합쳐놓은 격이다. 권한과 책임이 있지만 전문성이 없고(고용부), 전문성은 있지만 권한과 책임이 없는(공단) 조직을 합쳐 문제를 없앴다. 국제노동기구(ILO)도 협약 81호(공업 및 상업 부문에서의 근로감독에 관한 협약)에서 “산업안전보건 행정조직에 충분히 역량을 갖춘 기술자 및 전문가가 감독 업무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확실히 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영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사고가 나면 그 근본 원인까지 파헤쳐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처한다. 한국의 감독 체계는 대책보다는 처벌에 급급하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정진우 서울과기대 교수(안전공학)는 “영국의 산업안전보건청은 사고 조사 때 전문가가 관여해 회사의 관리적 요인과 체질까지 파헤치고 그걸 토대로 재발방지 대책을 찾아낸다. 한데 우린 법 위반 사항만 찾고 공학적·기술적 접근만 할 뿐이다. 비슷한 사고를 막기 위한 대책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에선 한해 2000명가량(지난해 고용부 집계 1957명)이 산업재해로 숨진다. 산재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부동의 1위, 영국을 포함한 유럽연합의 5배에 이른다. 안전보다 효율을 중시하고, 안전에 투자하지 않는 문화가 이런 결과를 낳는다. 문재인 정부는 자살자, 교통사고 사망자와 함께 산재 사망자의 수를 임기 내에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약했다. 영국은 기업살인법 도입 논의 과정에서 조직의 논리나 구조, 운영체계가 산재를 조장한다고 보고, 산재 발생 시 기업 그 자체에 책임(매출액에 비례한 벌금)을 묻기로 했다. 영국의 ‘강한 처벌’이 우리에게도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함인선 한양대 교수(건축학)는 “그 사회의 소득이 오르면 재해율은 내려가야 한다. 실제 (과거 선진국들이) 그랬다. 한데 우리는 그만큼의 안전 비용을 쓰지 않으려다 보니 소득만 오르고 재해율은 그대로다. 우리가 당대의 목숨 값어치와 안전비용을 어떻게 견주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871747.html?_fr=mt1#csidx7b70b452c8751f4aebe8dbf0cde669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