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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2011.05.30 09:00

광농민노 조회 수:20132

경상북도 소도시에 있는 미군 기지 내에 100톤 이상의 고엽제를 땅속에 파묻었다는 한 퇴역 미군의 양심선언으로 여기저기 우려의 시선대구 경북 쪽으로 모여들고 있는 것 같다.

미군과 관련된 다른 사건들과는 달리 한미 양국 정부가 발 빠르게 공동 조사단을 구성하여 실태 조사에 들어간 것은 무엇보다 매립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군 실무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니만큼 무턱대고 부인하기 어려운 속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조사의 초점은 고엽제라는 독성 물질의 불법 매립이라는 사실보다는 문제가 된 미군 기지 주변에서 '지금 현재' 다이옥신이 검출되는가 여부에 모아져 있는 것 같다.

사실 다른 제초제와 달리 고엽제(Agent Orange)가 사용이 금지된 독극물 수준으로 분류되어 있는 이유인류가 만들어낸 화학 물질 중에서 가장 독성이 강하다는 다이옥신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이옥신이 인체에 미치는 악영향은 긴 설명이 필요치 않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인데, 문제는 고엽제가 매립된 미군 기지 주변에서 다이옥신만 검출되지 않으면, 혹 검출되더라도 "미량"이거나, "기준치 이하"일 경우 문제가 없는 걸로 덮고 넘어갈 수 있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환경오염과 관련해서 "미량"이나 "기준치 이하"라는 말은 과학적 근거에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불씨를 잠재우려는 정치적 언어에 가깝다.

무기가 원시적 수준의 창검이 전부였던 고대 사회 때도 "군대가 머물다 지나간 자리에는 가시덤불만 자라고, 반드시 흉년이 들게 된다"고 하였다. 하물며 온갖 화학 물질과 중금속, 핵물질로 빚어낸 최첨단 무기가 가득한 현대의 군사 기지가 자립잡고 있는 곳의 토양은 어떤 형편일까?

기지 내부는 물론 그 주변의 환경오염은 현재 인간이 가진 지식과 능력으로는 해결책은 제쳐놓더라도 그 실태에 대한 정확한 분석조차 어려울지도 모른다. 다이옥신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미 반환된 미군 기지의 오염 실태에 대해서조차 한국 정부가 어떤 조사를 했는지, 복구 비용은 어떻게 마련하려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한미 공동 조사단이 미군 기지 캠프 캐럴 주변에 대한 실태 조사에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그 조사는 어디까지나 기지 주변에 대한 실태 조사일 뿐이고, 정작 오염원이 자리 잡고 있는 기지 내부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조사할 권한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 바로 '주한 미군 주둔군 지위 협정(SOFA)' 때문이다.

이런 형편임에도 기지 주변의 오염 실태에 대한 조사 과정에서도 벌써 문제를 침소봉대하려는 움직임들이 엿보인다. 캠프 캐럴 주변의 지하수에서 다이옥신이 미량 검출되었다는 보고서가 나오자 경상북도는 다이옥신 2차 조사를 중단시켜버렸다.

그런데 그 이유가 궁색하기 짝이 없다. "한미가 공동 조사 하는데 혼란이 생긴다"는 이유란다. 미군이 간섭할 수 없는 기지 외곽의 실태 조사조차 이 지경이면 기지 내부의 오염 상황에 대해서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도대체 이 땅은 뉘 땅인가?

1970년 후반 비무장지대(DMZ)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퇴역 미군은 "한국 국민들은 고엽제 사태에 당연히 분노해야" 한다고 증언했다. 분노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분노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나라의 법은 국민들의 분노를 쉽게 잠재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책임한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한 순간에 잠재운 것도 법의 힘이었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4대강 사업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잠재운 것도 법의 힘이었다. 4대강 사업으로 식수 대란이 예상된다는 이성적인 경고를 묵살하고 4대강 사업을 강행하도록 만들어 준 것도 법의 판단이었다. 결국 구미 지역에서 식수 대란이 현실화되었음에도 법은 무표정하게 법의 권위만을 드러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하지만 법은 항구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법은 언제든지 바꾸고 새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렇게 법을 만들고 바꾸는 것은 정치인들이 몫이고, 그런 법을 집행하는 권한을 위임받은 사람들 역시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그 정치인들의 생사여탈권은 주권자인 국민들이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인을 바꾸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미군의 고엽제 불법 매립에 따른 파문이 커지자 외교부는 "미비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으면 SOFA를 개정할 수도 있다"고 했다. 미비하거나 부족하다는 그 단서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지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하기에 미비하거나 부족한 상황이 오면 아마도 제일 먼저 발 벗고 나설 것이다.

10년 만에 "우리(?) 대통령" 뽑았다고 환호하던 대구 경북 지역에 유난히 흉흉한 일들이 겹치고 있다. 경제는 끝없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데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와 과학 비즈니스 벨트 유치 무산, 식수 대란에 이어 이번엔 고엽제 파동까지 덮쳤다.

하지만 이런 형편임에도 이 지역의 정치인들의 목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다. 다른 정치인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차기에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조차 자신의 지지 기반에 있어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서 식수 대란이 벌어져도 신비로운 묵언 수행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4·27 재·보선 뒤 다른 지역의 여당 국회의원들은 쓰나미를 만난 듯 허둥대며 안절부절하고 있는 듯한데, 이 지역 정치인들의 일상에는 아무런 변화 없는 평온함이 유지되고 있다. 지역에서 식수 대란이 일어나도, 지역에 위치한 미군 기지에 독극물을 파묻었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지역 정치인들의 성명서 한 장 구경할 수 가 없다.

다음 선거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한 심판, 응징론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데도, 현직 국회의원에 대한 지지 의사가 가장 높은 곳(<경향신문> 2011. 5.17 "국회의원, 나 떨고 있니?" 참조>, 지난 재·보선에서, 비록 유권자의 관심이 덜 가는 기초의원 선거이긴 하지만 야당 단일 후보를 경합도 아닌, 꼴찌로 낙선시켜 버리는 곳….

한나라당 일색의 대구·경북(TK) 정치인들이 일상의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유권자의 냉철한 이성과 투철한 주권의식으로 정치와 정치인을 바꾸지 못할 때 미군의 만행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는 법 앞에 또 한 번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The Colossus)>. ⓒwikipedia.org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말이다. 이 말과 함께 그가 남긴 그림 <거인>을 보면 오늘 우리가 떠안고 있는 위기의 실체를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괴물은 스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과 타성, 그리고 무기력한 체념이 키우는 것일 게다.
 

/김진국 의사·대구경북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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