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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이 다리 원래 빨간색 아니었어요?"

 

그러고 보니 10년도 훨씬 넘었다. 이 부산대교를 건넌 지. 빛바랜 빨간 다리를 건너 영도 외할머니 댁에 갈 때마다 설레곤 했다.

 

외할머니의 손녀 사랑은 지극했다. 엄마에게는 '무뚝뚝하고 엄격한 엄마'였다는 할머니는 손녀가 영도 집을 방문할 때면 "아이고, 우리 진이 왔나"하며 한달음에 달려 나와 두 팔을 벌렸다. 짧은 방문이 끝날 때면 눈물을 글썽이며, "하룻밤만 더 자고 가면 안 되나"라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런 할머니를 보면 이내 내 눈가에도 눈물이 맺혔다.

 

애정표현에 서툰 부모님 때문이었을까. 어릴 때는 '이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할머니'라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사는 영도는 늘 가고 싶은 곳이었고, 빨간 다리는 할머니 댁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그런데 10일 오후, 오랜만에 찾은 부산대교는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택시기사 아저씨가 대답했다.

 

"맞아예, 이 원래 빨간색이었는데 빨간색이 바다랑 뭐가 잘 안 맞다 그래가, 하얀색으로 새로 싹 칠했다 아인교. 이래 칠할 때도 한동안 되게 불편했어예. 근데 아가씨, 한진중공업 갔다왔는교?"

 

"이 뭐꼬!" 소리 지르며 실랑이... 부산 민심 안 좋아지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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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2차 희방버스'의 거리행진과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에서 열릴 집회를 불허한 가운데, 9일 오후 부산역광장에서 열린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를 마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영도조선소 앞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희망버스

부산 영도 85호 크레인 위에 '그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과 한진중 해고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내 기억 속 영도는 할머니의 마음처럼 넉넉한 곳이었으니까. 그곳에서 이미 세 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노동자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희망버스 취재하러 부산에 간다'고 전화로 말했을 때 엄마는 대뜸 "조심하라"는 이야기부터 했다. "안 그래도 넘의(남의) 회사 일에 외부 사람들이 나선다고 말이 많더라"고 말하기도 했다.

 

9일 오후 9시경, 1만여 명의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세찬 빗속을 뚫고 행진을 시작할 때만 해도, 피부로 느껴지는 '부산민심'은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시내버스 안에 들어가 인터뷰를 시도했던 강유진 인턴기자는 "욕만 엄청 듣고 쫓겨났다"고 전하기도 했다. 한 부산시민은 "안타깝고 동참하고 싶은데, 그래도 집에는 가게 해줘야 할 것 아이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뭐꼬!"하며 소리를 지르고 삿대질을 하며 참가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시민도 있었다.

 

부산역광장에서 영도대교로 이어지는 중앙대로를 점거하고 대규모 인원이 행진하는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처음 있는 일.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시민들은 어리둥절한 반응이었고, 특히 교통 불편 때문에 화를 냈다. '2차 희망버스 때문에 한진중 사태에 대한 부산 민심이 안 좋아지는 게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시끄러버도 할 일은 해야지, 욕 봤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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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경찰 저지선에 막혀 밤샘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10일 오전 부산 한진중공업 인근 경찰이 설치한 차벽 앞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소속 회원들이 연행자들의 석방과 정리해고 철회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유성호
희망버스

 

하지만 9일과 10일 집회가 열린 영도구 봉래동 주민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경찰이 한진중 입구를 차벽으로 봉쇄한 탓에, 차벽 너머에 집이 있는 주민들은 바로 앞에 집을 두고도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하는 등 불편을 겪어야 했다. 주거지역에서 밤새 집회가 진행되다 보니 소음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런데 10일 오전 6시경, 봉래동 해동병원 근처에서 만난 70대 할머니는 '밤새 시끄럽지 않으셨어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의외의 답변을 해왔다.

 

"빗속에 길바닥에서 밤 새는 사람들도 있는데 하루 시끄러븐 게 대순교. 시끄러버도 할 일은 해야지. 욕 봤심더. 오히려 동참을 못하는 게 미안하지."

 

할머니는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 가족 분들 중에 한진중 다니는 분이 계시냐"고 묻자,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할머니는 "아침운동 나가는 길"이라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오전 7시경 '연행자 전원 석방', '김진숙 지도위원과의 만남'을 요구한 기자회견이 열린 이후, 차벽 앞 7차선 도로에서는 한바탕 '난장'이 벌어졌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참가자들은 사물놀이에 맞춰서 한바탕 '춤판'을 벌이기도 하고, 대형 걸개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차벽 앞에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 회원들이 휠체어를 타고 연행자 석방과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다.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가는 길이라는 전아무개(41)씨도 잠시 오토바이를 멈추고 '난장'을 지켜보았다. 전씨는 "경찰이 군데군데 있으니까 애들 보기에 안 좋다"면서 "시민들에게 큰 불편만 없다면, 노동자들 때문에 (집회) 하기는 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도에서 돈을 벌었으모, 여서 일하는 사람들 믹이 살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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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버스'에 참가한 전국 각지의 시민들이 경찰 차벽에 막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중인 '85호 크레인'에 접근하지 못한 채 1박 2일 일정을 마무리하게된 가운데,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와 가족들의 환송을 받으며 떠나고 있다.
ⓒ 권우성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이 동네에서만 30~40년을 살았다"는 50~60대 아주머니들도 삼삼오오 둘러앉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 아(애)들 배가 얼마나 고프겠나 싶어가, 내 애가 터진다 고마. 이래 있어도…. 아침에 밥을 좀 해올라켔드만 워낙 인간들이 많아가. 서울에서 왔지, 어디서 왔지, 부산 사람들은 마 집에 가뿌믄 되는데, 서울사람들은 워낙에 멀리서 와가. 저 아(애)들을 우야겐노."

 

"갱찰들은 전부 다 도시락 묵드만. 여(여기)만 이래 못묵는기라."  

 

"내도 밤새도록 맻 바퀴를 돌았다 아이가. 돌아댕기면서 아(애)들한테 '니 어디서 왔노' 이라니까 '강남에서 왔어요', 또 어디서 왔어요. 다 다르더라꼬. 아가씨는 어데서 왔노?"

 

'서울에서 취재왔다'고 하자, 대뜸 '밥은 먹었냐'고 묻는다. '외부세력들이 남의 회사 일에 간섭한다고 비판의 목소리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고 묻자, 한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차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아(애)들이 부산에 뭐가 해당이 있어가 저래 앉아가꼬 있겐노. 도와줄라꼬 온거지. 아이고, 옷도 저 다 배맀뿐네. 아까 <부산일보>에서도 물어보드만, 나는 열 번을 물어도 (한진중공업이) 여(이곳에) 있어야 된다예요. 저 사람들 정리해고 한 게 필리핀 갈라꼬 그런거라 카대예. 요새 등록금도 비싼데 나(나이) 들어가 정리해고 당하면 머 먹고 살라꼬."

 

기자와 인터뷰 한 십여 명의 봉래동 주민들은 '한진중의 정리해고 문제'를 '조선소 이전'과 함께 생각하고 있었다. 오후 3시경 '2차 희망버스'가 '3차 희망버스'를 약속하며 떠나자, 경찰들도 그 견고하던 차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정준호(60)씨가 말했다.

 

"저 갱찰들 보소. 아(애)들 아인교. 불쌍하지. 갱찰들이야 시키는 대로 해야하는 거고,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합니까. 결론은 뭡니까. 돈 많은 사람들(한진중)이 받아줘야지. 누가 말해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이때까지 여서(한국에서) 얼마나 벌었는데. 돈을 벌었으모 여(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을 믹이(먹여) 살리야지. 필리핀에다 조선소를 차맀다 아입니까. 있는 사람들이 베풀어야지. 나(나이) 많은 사람들 정리해고 시키면은, 한창 애들 키워야 하는데. 없는 사람들만 불쌍한기라."

 

조선업에 종사했다는 정씨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비롯한 한진중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정씨는 "아가씨, 김진숙이가 뭘로 시작했는지 압니까, 여서 용접공을 했어요"라며 "또 노조위원장도 죽었다 아입니까, 박(박창수) 누고, 맻명 죽었어요, 문제있는 회사라니까"라고 고개를 저었다.

 

"세금이 썩었는가베, 갱찰이 와 저래 많이 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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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부산 영도구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186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10일 오후 경찰 병력들이 공장 주위를 지나고 있다. 경찰은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2차 희망버스' 참가자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7천여명의 경찰을 한진중공업 주위에 배치했다.
ⓒ 권우성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경찰 차량이 빠져나가는 광경을 지켜보던 양아무개(64)씨 역시 한진중이 부산을 떠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양씨는 "내가 팽생을 영도에서 살았는데 한진중이 수백 억을 벌었어요, 그래놓고 공장 옮기뿌면 여(여기) 사람들 다 죽어요"라면서 "저 사람들(희망버스 참가자) 저래 와가 싸우는 거 가꼬 뭐라 하는 사람들은 뭘 모르거나 '있는' 사람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우리 대신해서 싸워주는 거니까 오히려 고맙지예"라고 덧붙였다. 옆에 있던 다른 주민은 끊임없이 나가는 경찰차량을 보면서 "세금이 썩었는가베, 와 저래 많이 왔노, 갱찰이, 와 저래 과잉대응을 하노"라며 혀를 찼다.

 

양씨는 '전날 밤 연행당한 학생이 잃어버리고 간 가방을 주웠다'면서 기자에게 전해줬다. 그러고는 "갱찰한테 넘기면 안 됩니다"라고 몇 번이고 확답을 받았다. 가방 안에는 몇 만 원이 들어있는 통장과 도장이 들어있었다. 추후 확인결과 가방의 주인은 서울에 살고 있는 고등학생으로 밝혀졌다.

 

희망버스에 경찰버스까지 더해져, 한진중을 떠나 부산 집으로 가는 택시는 정체를 거듭했다. '3차 희망버스가 온다'고 하자, 택시 기사 아저씨는 "한 번 더 와? 또 있어요?"라면서 "개인들이 공권력한테 이길 수 있는교, 저거는 이길 수 없다고 봐야제"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어 "전국에서 저(저기) 온 사람들이 만 명이 넘는다 카던데, 전부 다 노조인교?"라는 아저씨의 질문에 내가 "대부분이 가족, 연인, 친구들"이라고 답하자, 아저씨는 조금 놀라는 듯했다. 

 

'2차 희망버스 승객'들이 끝내 김진숙 지도위원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던 10일 오후, 김 지도위원은 정리집회를 통해 "우리가 만든 일은 기적이다, 어제 오늘은 역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 고향 부산, 영도에서는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얀 다리 아래로 할머니 마음처럼 넓어 보이는 파란 부산 바다가 보였다.

출처 : "세금 썩었는가베...경찰, 와 저래 많노"  외부세력? 영도 주민은 '희망버스' 반겼다 - 오마이뉴